
반도 —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 후에 남겨진 사람들
다시 생각해 보면, 그건 그냥 좀비 영화가 아니었다.
처음엔 그랬다. 〈반도〉라는 제목을 보고, ‘아 부산행 후속이구나’ 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측했다.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사람들은 비명 지르며 도망치고, 몇몇은 죽고, 몇몇은 살아남는 이야기. 거기까지. 하지만 막상 보고 나면… 생각보다 마음 한편이 오래 남는다. 이상하리만치.
이야기는 〈부산행〉 이후, 4년 후의 폐허가 된 한반도에서 시작된다. 전 세계는 이미 한국을 포기했고, 그 땅은 그냥 고립됐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고, 아무도 구하지 않는다. 그저 남겨진 채 버려진 땅. 그리고 거기 다시 들어가야만 하는 한 남자. ‘정석’.
강동원이 연기한 정석은 사실 영웅도 아니고, 위대한 사람도 아니다. 그냥…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과거에 도망쳤고, 가족을 지키지 못했고, 그 기억을 피해 외면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그 땅으로 발을 들여야 했다. 돈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그게 핑계 같았다. 그냥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았던 거 아닐까. 어디선가 한 번쯤은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던 무언가가 있었던 거다.
반도 안은 상상 이상이었다. 좀비보다 더 두려운 건, 사람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잔인해졌고, 오래 버틸수록 더 무뎌졌고, 결국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들. 631부대. 그 안에서 ‘놀이’가 돼버린 좀비 사냥은, 그냥 공포 그 이상이었다. 무너진 윤리, 사라진 인간성. 연상호 감독은 일부러 그걸 과장하지도, 감추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외면했던 잔인한 진실처럼.
그리고 거기서 정석은 한 가족을 만난다. 민정과 그녀의 두 딸.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큰딸 ‘준이’였다. 처음엔 ‘와, 아이가 너무 잘 싸운다’는 감탄이 먼저였지만… 갈수록 느껴진 건 이 아이가 이 세계에서 얼마나 오래 싸워왔는지에 대한 무게였다. 운전대를 잡고, 좀비 떼를 돌파할 때의 그 눈빛. 살기 위해 무언가를 이미 많이 잃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눈빛.
그 가족은 이상했다. 너무 이상하게 따뜻했다. 왜 저런 폐허 속에서도 서로를 믿고, 보호하고, 웃을 수 있을까. 이상할 정도로, 나도 모르게 그 가족이 살아남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더라.
사람을 잃고, 사람에게 다시 끌리는 감정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중심은 점점 더 감정으로 옮겨간다. 그냥 탈출이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끝까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느냐의 이야기였다.
정석은 결국 자신을 희생하려 한다. 민정과 아이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그 선택이 전혀 뜬금없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부터 그걸 위해 들어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한 사람을 잃고, 다시는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은 사람. 그게 그였던 것 같다.
민정이 구조선 위에서 돌아보며 외친다. "정석 씨!"
그 장면은… 뭐랄까, 말로 다 설명이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 짧은 한마디에 수없이 많은 감정이 들어 있었다. 미안함, 고마움, 애틋함, 놓기 싫은 마음. 다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됐다. 이건 탈출 서바이벌이 아니구나. 이건 고립된 마음에 대한 이야기고, 누군가와 다시 연결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구나.
그리고 마지막 장면. 유엔 군함이 떠나는 바다 위. 햇살이 비치고, 바람이 스친다. 긴 싸움이 끝났고, 살아남았다. 그런데 그 얼굴들에 남은 표정은 기쁨이 아니었다. 슬픔도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는 눈빛.
아마 그런 거다. 우리는 그런 눈빛을 가질 수 있을까. 다 무너진 후에도, 다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까.
〈반도〉는 〈부산행〉만큼의 임팩트를 주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관객 평점이 낮다는 얘기도 많고, 기대에 못 미쳤다는 말도 많다. 그런데 그런 평가를 넘어서 나는 이 영화를 잊을 수 없었다.
왜냐면… 이건 끝나지 않은 이야기였으니까. 무너진 세계에서도 서로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괴물 속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 했던 흔적이 있었으니까.
액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감정이 남아서. 좀비가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이 더 무서웠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게 더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