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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신〉 –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순간, 저주는 시작된다

by 블립정보 2025.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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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분홍신〉 공식 포스터 – 분홍색 하이힐과 공포에 질린 여주인공의 모습
이미지 출처-네이버 영화

분홍 하이힐이 남긴 공포, 그 안에 숨겨진 욕망의 그림자

어릴 적 읽었던 안데르센 동화 ‘빨간 구두’가 떠올랐다. 예쁜 구두 하나로 인해 멈출 수 없이 춤을 추게 되는 소녀의 이야기. 예쁘고 화려한 것에 매혹된 대가는 결코 달콤하지 않았다. 영화 〈분홍신〉도 그런 이야기를 다룬다. 단지 조금 더 잔인하고 조금 더 현실적이며 무엇보다도 ‘진짜 무섭게’ 다가온다.
〈분홍신〉은 김용균 감독이 연출한 2005년작 한국 공포영화다. 여름 시즌에 개봉했던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100만 관객을 넘기며 꽤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단순한 슬래셔물이 아닌, 무언가 더 깊고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지금 다시 봐도 꽤나 신선하다. 무엇보다도 김혜수가 공포영화에 출연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엔 큰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남편의 외도로 인해 딸 태수와 단둘이 살아가게 된 선재(김혜수)는 어느 날 지하철에서 이상하게 끌리는 분홍색 하이힐 한 켤레를 발견한다. 그녀는 무심코 그 신발을 집으로 가져오게 되는데, 이후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신발을 신은 사람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대부분은 기괴하게도 발이 절단되어 있다. 선재는 이 신발에 얽힌 과거와 저주의 정체를 쫓아가며, 마침내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에 다가서게 된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분홍신’이라는 사물 하나를 통해 공포를 전달한다는 점이다. 피 튀기는 장면보다는, 이상하리만치 억눌린 분위기와 서늘한 색감, 예측할 수 없는 사건 전개가 중심을 이룬다. 이때 분홍색이라는 색상이 주는 양면성도 인상적이다. 일반적으로는 순수함, 사랑, 여성성을 상징하는 색인데, 영화에서는 그 색이 곧 공포의 상징으로 변모한다. 보는 사람에게 혼란을 주고, 동시에 시각적으로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분홍신〉은 단순히 귀신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 내면의 욕망과 집착, 질투 같은 감정이 만들어낸 ‘자기 파괴’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누구나 한 번쯤 갖고 싶어 했던 아름다운 것. 그러나 그것을 가졌을 때 감당하지 못할 무게가 따라온다는 것. 이 영화는 그런 교훈을 무섭도록 섬뜩하게 전달한다.
김혜수의 연기는 상당히 절제돼 있다. 과장되지 않지만, 그 안에서 흐르는 공포와 불안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특히 딸 태수 역을 맡은 아역 배우 박연아와의 호흡도 자연스러웠고, 둘 사이의 감정선이 후반부에서 큰 파급력을 일으킨다. 개인적으로는 ‘미희’ 역으로 등장한 고수희의 캐릭터도 잊히지 않는다. 그녀의 행동과 표정, 특히 분홍신에 집착하게 되는 과정은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거울 같았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한국의 무속과 귀신설화를 끌어오면서도, 현대적인 공간인 지하철, 아파트, 병원 등을 배경으로 삼아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래서 더 무섭다. 너무 일상적이기 때문에 관객은 쉽게 그 공포를 현실에 이입하게 된다.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점점 더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것이 단순한 귀신 이야기의 진실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진실이라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분홍신을 둘러싼 과거의 비극, 욕망으로 인해 서로를 해치게 되는 인간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성애와 여성 간의 질투가 이 영화의 중심 테마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단순히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는 공포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성 간의 갈등과 연대, 그리고 억눌린 감정들이 어떻게 외부의 공포로 투영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여성의 욕망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제어되고 억압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상업 영화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선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순간 관객도 덩달아 고민하게 된다. 과연 저 신발이 문제였던 걸까. 아니면 우리 마음속 욕망이 진짜 원흉은 아니었을까. 만약 내 앞에 분홍신이 있다면, 나는 과연 신지 않을 수 있을까.
〈분홍신〉은 단순한 여름용 오락 공포물이 아니다. 공포라는 장르를 빌려, 인간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비추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때로는 귀신보다 훨씬 더 소름 끼치다. 예쁘고 탐나는 것일수록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며, 그것이 곧 인간의 본성을 시험하는 장치가 된다는 점. 이 영화는 분명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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