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이 사라지기 전, 그는 왜 끝까지 싸워야만 했을까 – 영화 <리멤버> 리뷰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 어떤 건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게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영화 <리멤버>를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란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가 아니라, 때로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마지막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일형 감독이 연출하고 이성민, 남주혁이 주연한 이 영화는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복수라는 외형을 갖췄지만 **진짜 이야기의 중심은 '기억'과 '책임'**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영화가 끝나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잊지 않기 위해, 그가 선택한 마지막 여정
주인공 한필주는 80대 노인이다.
그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기억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파에게 가족을 잃었던 그날의 기억이다.
이제 그는 모든 걸 정리하고 복수를 시작하려 한다.
왜 지금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난 곧 모든 걸 잊어버릴 테니까.”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이 영화의 시작은 이렇게 담담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한 사람이 60년 넘게 품어온 기억.
그건 단지 누군가를 처벌하겠다는 복수심이 아니라, 잊히지 말아야 할 역사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동행이 된 청년, 박인규
필주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청년 박인규에게 조용히 운전 부탁을 한다.
일주일간만 도와달라고. 목적지는 말하지 않는다.
인규는 흔쾌히 승낙한다.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인규는 곧 알게 된다.
이 여정이 단순한 드라이브가 아니라는 걸.
한필주의 복수는 진짜고, 첫 복수 현장에서 인규는 범행 현장의 CCTV에 찍혀버린다.
처음엔 당황하고, 도망치려 했지만 인규는 결국 그와 함께 길을 걷는다.
점점 그 복수의 이유를 이해하게 되면서, 그는 단순한 조력자에서 감정적 연대자가 되어간다.
두 사람의 간극은 나이 차이만큼이나 컸지만, 그들이 공유하게 된 ‘기억의 무게’는 같은 방향을 향한다.
이성민의 연기, 그 자체가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 이성민이 아니었다면 감정선이 이렇게까지 살아났을까?
그의 연기는 정말 눈빛 하나, 손짓 하나에도 감정이 살아 있다.
특히 기억이 흐려질 때의 공허함, 그리고 확신 속에서도 흔들리는 복잡한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표현했다.
반면 남주혁은 점차 변화하는 인물의 성장곡선을 따라간다.
시작은 그냥 운전만 해주는 아르바이트생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얼굴에서도 책임감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케미는 세대를 넘는 감정적 교차점을 만들었고, 관객도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녹아들 수 있었다.
액션 대신 감정을 택한 연출, 그리고 묵직한 침묵
<리멤버>는 복수를 다룬 영화지만, 총이나 피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있다.
바로 ‘감정’이다.
이일형 감독은 감정을 쌓는 데 시간을 들인다.
조급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이 많다.
카메라는 주인공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오래 비춘다.
그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보게 된다.
특히 알츠하이머라는 설정은 이 영화의 긴장감을 더 끌어올린다.
이 사람이 정말 내가 찾던 그 사람일까?
기억은 흐릿해졌지만, 그 감정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래서 더 위험하고, 더 안타깝다.
한국적 리메이크의 방향, 그리고 오늘의 질문
사실 이 영화는 2015년 캐나다-독일 합작 영화 <Remember>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은 나치 전범을 찾아가 복수하는 이야기를 다뤘고, 한국판은 친일파를 향한 복수로 바뀌었다.
이건 단순히 배경만 바꾼 게 아니다.
<리멤버>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친일 청산은 과연 끝났는가?”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지 않을까?”
이 영화의 복수는 그래서 더 무겁게 다가온다.
그건 개인적인 감정 해소가 아니라, 역사적 책임에 대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 그리고 그가 남긴 한마디
영화의 끝에서, 나는 그냥 앉아 있었다.
음악이 흐르고 자막이 올라가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기 어려웠다.
마지막까지 필주는 흔들리지만, 끝내해야 할 일을 마친다.
그의 표정에는 안도와 후회, 그리고 ‘끝’이 담겨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반드시 끝내야만 했습니다.”
그 한마디는 영화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조용히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무엇을, 누구를 기억해야 할까
<리멤버>는 그저 복수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기억에 대한 영화이고,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동시에, 잊어서는 안 되는 어떤 진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영화를 통해 나는 생각했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 단지 병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책임을 미루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걸.
그래서 누군가는 끝까지 기억해야 한다.
그게 바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