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호 감독의 <계시록> – 믿음이라는 이름의 광기, 혹은 구원
넷플릭스를 켰다가, 우연히 <계시록>이라는 제목을 봤다. ‘연상호 감독’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고, 류준열과 신현빈, 그리고 신민재라는 익숙한 얼굴들이 함께하니 자연스럽게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뒤, 나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손에 들었던 컵은 어느새 미지근해졌고, 화면은 끝났는데도 머릿속은 여전히 영화 속에 남아 있었다.
<계시록>은 실종 사건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믿음을 가진 세 인물이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흔히 볼 수 있는 스릴러나 수사극의 틀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종교와 인간 본성, 신념과 광기, 구원과 심판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단순히 ‘누가 범인인가’를 묻는 영화가 아니라,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영화다. 그것도 꽤 무겁고, 또 불편하게.
류준열이 연기한 성민찬이라는 인물은,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굳게 믿고 있고, 그 믿음은 일종의 ‘사명감’으로 작동한다.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보는 쪽이 불편할 정도로 단단하다. 하지만 그 단단함은 점점 광기처럼 느껴진다. 그는 세상을 구원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구원하고 싶은 것일까.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따라다닌다.
반면 신현빈이 연기한 형사 이연희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이성적으로 사건을 쫓고 있지만,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다. 죽은 동생의 환영을 보며 괴로워하고, 그 괴로움은 신을 의지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그 믿음을 선택하지 못한다. 오히려 계속해서 의심하고, 돌아보고, 스스로를 검증한다. 어쩌면 그 모습이 가장 현실적인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갈등의 중심에는 아이, 영재가 있다. 신민재가 연기한 이 인물은 말이 거의 없다. 하지만 존재만으로 모든 것을 이끌어간다. 그의 침묵은 설명이 없기 때문에 더 무섭고, 더 의미심장하다. 그 아이를 통해 우리는 이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성민찬은 그를 구원자라고 믿고, 이연희는 그를 사건의 실마리로 본다. 관객인 우리는, 그 아이가 진짜 ‘무엇’을 상징하는지 끝까지 고민하게 된다.
연상호 감독은 이전 작품들에서도 늘 인간의 본성을 날카롭게 파헤쳐왔다. <부산행>에서는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인간의 이기심을, <지옥>에서는 신의 심판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 전체의 집단 광기를 조명했다. 그런데 <계시록>은 조금 다르다. 이번엔 훨씬 더 조용하고, 내밀하다. 군중이나 거대한 시스템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을 더 깊이 파고든다. 그래서 더 불편하고, 그래서 더 진실하다.
영화를 보면서 나 자신에게도 여러 번 질문하게 됐다.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내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됐는가’, ‘그 믿음은 진실인가, 혹은 내가 만든 허상인가’. 이 영화가 강력한 이유는 바로 그런 ‘불편한 질문’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단순히 공포를 주는 게 아니라, 내 안의 무언가를 계속 찔러댄다. 그것이 불쾌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형식적으로도 영화는 흥미롭다. 대사보다는 침묵과 시선, 그리고 공기 같은 것들로 인물의 감정을 표현한다. 카메라는 조심스럽게 따라가고, 조명은 인물의 심리를 반영하듯 어둡고 무거운 톤으로 유지된다. 장르적으로 보면 스릴러지만, 실제로는 심리극에 가깝다. 그래서 더 몰입하게 된다. 단순히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이 사람이 다음에 어떤 감정을 보일까’가 궁금해진다.
무엇보다 마지막이 강렬하다. 사건이 수습되었는지, 정의가 실현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과정을 거친 인물들의 얼굴이다. 믿음을 관철한 자, 끝내 믿지 못한 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이. 그들의 표정 속에 이 영화의 모든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정답은 없지만, 질문은 남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는다.
<계시록>은 쉽게 보기엔 무겁고, 한 번 보고 끝낼 영화는 아니다. 여운이 길고, 가슴 한편을 자꾸 찔러댄다. 하지만 그게 이 영화의 진짜 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평소에 외면했던 질문들, 생각조차 하지 않던 믿음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그 자체로 이미 의미 있는 경험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던 이유, 그건 아마 이 영화가 내게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 묻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지만, 아마 당분간은 이 질문을 계속 품고 살아가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