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한복판에서 천천히 피어난 감정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고
서울이라는 도시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 이상한 공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스쳐 지나가고 거리마다 불빛은 가득한데 어쩐지 마음은 늘 조금 허전하고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든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바로 그런 서울이라는 공간 한복판에서 서로 너무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서로에게 스며들고 어떻게 사랑이라는 이름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지를 조용하지만 솔직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다.
크게 울리는 사건도 없고 빠르게 흘러가는 전개도 없지만 그 대신 아주 조용하고 아주 섬세하게 감정이 피어나고 사라지는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들의 감정이, 그들의 눈빛이, 마치 내 이야기처럼 마음속에 들어와 있게 된다.
다르다는 것,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가까워진다
재희는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사랑하게 되면 그 마음을 감추지 않으려 하고, 때로는 그 직진하는 감정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다.
그에 반해 흥수는 좀 다르다.
늘 조심스럽고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에 익숙하지 않고 마음을 표현하기보다는 꾹 눌러 삼키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다.
이렇게 너무 다른 두 사람이 서울이라는 낯설고도 복잡한 도시에서 우연히 한 집에 머물게 되고 처음엔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의 방식에 당황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 시간이 조금씩 쌓이면서 생각보다 서로에게 많은 걸 주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사랑이라고 단정 짓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단순한 우정이라고 하기에도 무언가 다른 그 미묘한 감정의 흐름 속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아주 천천히 서로에게 스며든다.
도시의 풍경 속에 감정이 묻어나온다
서울이라는 공간은 이 영화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을 담아내는 또 하나의 얼굴처럼 느껴진다.
무심하게 반복되는 출근길, 빗물이 번지는 창가, 불빛으로 가득한 밤거리와 말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이 겹쳐지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감독이 공간을 단순히 배경으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인물들의 내면을 비추도록 구성했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늘 바쁘고 복잡하지만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어쩐지 항상 조금은 외롭고 그 외로움은 꼭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장면 하나하나 속에 차분하게 배어 있다.
그 풍경 속에서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감정의 변화는 마치 실제 우리가 겪는 관계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고 그래서 때로는 스스로도 잊고 있었던 어떤 감정을 불쑥 끌어올리게 만든다.
설명하지 않고도 마음을 전하는 연기
김고은은 재희라는 인물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봐온 ‘밝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복잡한 감정선을 가진 인물을 보여준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면서도 그 안에 감춰진 외로움과 상처를 너무 억지스럽지 않게 드러내고 때로는 아주 짧은 정적 속에서도 그녀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만든다.
노상현이 연기한 흥수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 미세한 눈빛이나 작은 행동 하나가 전부인데 그가 보여주는 ‘말 없는 감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조심스러워서 관객 스스로가 그의 감정을 느끼고 따라가게 된다.
두 사람의 감정선은 절제돼 있지만 깊고 그 안에 살아 있는 진심이 묻어나기 때문에 장면 하나하나가 오래 남고
특히 대사가 없어도 전해지는 순간들이 인상 깊다.
사랑이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감정
〈대도시의 사랑법〉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답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하지만 다가가자니 겁나는 마음, 서로를 알고 싶지만 어느 순간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벽 같은 감정들.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모든 미묘하고 복잡한 마음을 이 영화는 천천히 꺼내 보여주면서도 어떤 것도 단정 지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 진심이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처음엔 그냥 조용한 영화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 장면들이 자꾸 떠오른다.
그때 말하지 못했던 마음 그 사람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괜히 혼자 삼켜버렸던 감정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면서 이 영화가 나에게 어떤 감정의 결을 건드렸는지 조금씩 알게 된다.
어떤 장면은 내가 겪은 장면 같고 어떤 대사는 꼭 내가 했던 말 같아서 괜히 마음이 먹먹해지고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그게 이 영화의 진짜 여운이다.
사랑은 늘 조심스럽고 서툴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늘 드라마처럼 뜨겁고 빠르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때론 이렇게 조용하고 때론 이렇게 망설여지고 때론 이렇게 가까이 가고 싶으면서도 한 발짝 물러서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 예전에 그런 감정을 느껴봤던 사람 혹은 아직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는 사람이라도
이 영화는 그 마음속 어딘가에 분명 조용한 떨림을 만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