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오동 전투 리뷰|가슴이 뜨거워지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음속 어딘가가 묵직하게 눌려 있는 느낌. ‘봉오동 전투’는 그런 영화였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도, 끝내고 나면 뭔가 뜨거운 것이 목에 걸리는 그런 영화. 단순한 전쟁 영화가 아니었다. 누가 칼을 들었는지, 누가 총을 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왜 싸웠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작은 조용하다. 고요한 산골 마을 봉오동.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일본군의 잔혹한 학살과 폭력.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분노. 영화는 도망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 위해 일본군을 유인해 들어가려는 전략의 이야기다. 그 중심에 황해철, 이장하, 마병구가 있다. 다들 전혀 다른 성격과 방식으로 움직이지만, 결국 같은 자리를 향해 달려간다.
■ 황해철 – 말없이 앞장서는 사람 유해진이 맡은 황해철. 처음엔 익숙한 얼굴이라 반가웠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안 돼, 그는 더 이상 ‘유해진’이 아니었다. 말도 많지 않고, 표정도 자주 바뀌지 않지만 그 눈빛 하나로 모든 걸 말한다. 동료가 쓰러져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대신 총을 들고 앞으로 나아간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사람.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위해 맨 앞에서 길을 여는 사람. 그게 황해철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적진을 향해 몸을 던지는 순간. 잠깐 눈을 감았다 뜨는 그 찰나의 모습에서 무서움과 단념과 결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이장하 – 웃음 많던 청년의 변화 류준열의 이장하는 처음엔 너무 가벼워 보이기까지 했다. 웃기고, 놀리고, 분위기 메이커처럼 보였다. 그런데 전투가 시작되고, 동료가 죽고, 진짜 적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서 그는 달라진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숨죽이며 총을 들고, 마침내 뛰어든다.
그 변화가 참 인상 깊었다. '어쩌다 싸우게 된 사람'이 '스스로 싸우기로 결심한 사람'으로 바뀌는 모습. 그게 이장하였다.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 그는 더 이상 장난기 많은 청년이 아니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스스로를 다잡은 독립군이었다.
■ 마병구 – 이성으로 버티는 전략가 조우진의 마병구는 계산적이고 차가워 보인다. 감정도 잘 드러내지 않고, 늘 상황을 먼저 본다. 때론 너무 냉정해서 “이 사람은 진짜 사람이 맞나?” 싶은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런데 그게 다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라는 걸, 시간이 갈수록 알게 된다.
무모하게 들이대기보단 돌아가고, 기다리고, 움직일 때 움직이는 사람. 마병구가 없었다면 봉오동 전투는 승리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사람, 그 안에 감춰진 인간적인 고뇌가 뒤늦게 밀려왔다.
■ 원신연 감독 – 총보다 사람을 찍다 이 영화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 중 하나는, 전쟁을 다루면서도 사람의 얼굴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총소리와 폭발음이 울릴 때도, 카메라는 흔들리는 손, 불안한 눈동자, 그리고 한 번 더 숨을 들이마시는 얼굴을 비춘다.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전쟁의 화려함이나 전략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 그들이 어떻게 버텼고, 어떤 마음으로 싸웠는지. 그래서 이 영화는 전쟁 영화이면서도, 아주 인간적인 드라마였다.
■ 봉오동 계곡 전투 – 모든 감정이 터진 순간 영화 후반부, 봉오동 계곡에서의 전투는 정말 숨이 막혔다. 숨을 쉬는 것도 조심스러울 만큼 긴장감이 넘쳤고, 전투 장면 하나하나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냥 총 쏘고, 달리는 장면이 아니다. 그들이 왜 싸우는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총 한 발 한 발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 장면을 보면서 손에 땀이 났다. 동시에 마음속 어딘가가 아려왔다.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게 너무 뚜렷하게 느껴졌다.
■ 마지막 문장 –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후 청산리 전투로 이어졌다.” 이 한 문장이 영화의 마지막에 흐른다. 짧지만 강한 문장. 봉오동 전투는 하나의 승리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거대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 시작점에 있었던 사람들. 이름도 남지 않은 그들의 싸움이, 이 영화로 인해 다시 조명된다.
그걸 보면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 내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며 살고 있는가?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싸웠고, 나는 그 덕분에 지금을 살고 있다.
■ 마무리하며 ‘봉오동 전투’는 잘 만든 영화다. 동시에 꼭 봐야 할 영화다. 전쟁 영화라고 해서 어렵거나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고,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무언가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속 어딘가가 오래도록 따뜻하게 남는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믿고 싶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나 역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