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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더 무서운 영화, 〈이끼〉를 다시 보다

by 블립정보 2025.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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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끼〉 포스터 – 손전등을 든 남자(박해일)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어두운 배경 속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곳, 이 사람들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문구가 강조됨

영화 〈이끼〉를 보고 – 침묵과 공포가 자라는 마을에서

한동안 마음이 허할 때면 오래된 한국 영화를 찾아보곤 한다. 번쩍이는 CG나 빠른 전개보다는, 느리고 묵직하게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들이 가끔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이끼〉(2010)는 나에게 오래도록 남을 경험이었다. 처음 봤을 땐 묘하게 찝찝하고, 다시 봤을 땐 묵직한 한숨이 났다. 영화는 스릴러지만, 보는 내내 마음속에서는 스릴보다는 분노, 안타까움, 자괴감 같은 감정들이 밀려왔다.
처음에는 그저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으로 시작된다. 유해국(박해일)은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오랜만에 시골 마을을 찾는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어딘가 수상하고, 이장 천용덕(정재영)은 어딘가 믿음직하면서도, 동시에 위협적이다. 누가 봐도 ‘뭔가 있는’ 분위기다.
해국은 아버지의 죽음이 단순한 자연사가 아님을 직감하고, 마을에 머물며 진실을 찾기로 한다.
이 영화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뭔가 단번에 해결되는 게 아니라, 마치 이끼가 벽을 따라 천천히 자라듯, 진실도 서서히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유해국과 함께 의심하고, 추측하고, 분노한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마을의 진짜 모습은, 단순한 ‘한 사람의 악행’이 아닌, 전체 공동체의 침묵과 공모였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배우들의 힘 – 그 사람 자체처럼 느껴지는 연기

사실 이 영화가 이렇게 몰입감 있게 다가오는 데에는 배우들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박해일은 특유의 차분한 얼굴로, 하지만 그 안에 의심과 분노, 슬픔이 겹겹이 쌓여 있는 인물을 표현했다. 처음에는 약간 무력한 느낌이 들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날카로워지고, 감정도 격해진다. 그 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 감정에 함께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이 영화의 핵심, 정재영의 천용덕. 이 인물은 너무나도 무섭다. 무서운 이유는 크게 소리 지르거나 직접적으로 폭력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다정한 얼굴로, 이웃을 돕는 것처럼 말하면서, 자신의 논리로 모든 걸 장악한다. 정재영은 그런 ‘권력자’의 모습을 정말 섬뜩하게, 동시에 매끄럽게 표현했다. 보는 내내 “이런 사람, 어딘가에 진짜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준호가 맡은 유목형 역시 인상 깊다. 이 인물은 직접적으로 많은 걸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눈빛, 말투, 과거에 짊어진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처음에는 무섭게 느껴지다가도, 나중엔 그가 이 마을의 비극에 누구보다 가깝게 다가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침묵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기에 생긴 침묵이라는 걸 알게 되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배우, 유해진. 이 영화에서도 특유의 개성을 보여주지만, 익숙한 유쾌함이 아닌 이질적이고 섬뜩한 분위기로 스토리에 긴장감을 더해준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불안감은 이야기 전개에 있어 훌륭한 장치였다.

원작 웹툰과 영화 – 같은 이야기, 다른 감정선

사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 윤태호 작가의 원작 웹툰 〈이끼〉도 이미 접한 상태였다. 웹툰은 훨씬 더 서사가 길고, 인물들의 사연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원작이 가진 힘도 대단했지만, 강우석 감독이 그 긴 이야기를 영화로 잘 정리해 낸 점이 정말 놀라웠다.
물론 영화는 2시간 40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을 갖고 있지만, 그 속에 웹툰의 핵심 메시지를 잘 압축해 놓았다. 특히 시각적인 분위기와 배우들의 눈빛 하나하나에서, 웹툰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생생함이 느껴졌다. 마을의 습기 찬 공기, 어두컴컴한 골목, 낮게 깔린 조명... 이런 것들이 이 이야기의 분위기를 배가시켰다.

침묵과 공포 –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 영화가 말하는 '악의 구조'다. 천용덕이라는 절대 권력자의 존재도 무섭지만, 진짜 무서운 건 그를 알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마을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빚을 졌고, 어떤 사람은 생계가 걸려 있었고, 어떤 사람은 그냥 무관심했다. 그렇게 모두가 ‘조금씩’ 죄를 짓는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죄는 결국 커다란 비극이 된다.
이건 단순한 시골 마을 이야기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도, 누군가는 권력을 갖고 있고, 누군가는 그 권력에 침묵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 침묵이 쌓이면, 결국 누군가는 희생된다. 그게 너무 현실 같아서,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동시에, 이 영화를 만든 이유가 바로 그 불편함을 전달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무리하며 – 나는 침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끼〉는 화려하지 않다. 엄청난 반전이나 눈을 사로잡는 액션도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조용히, 아주 무섭게 관객을 흔든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운이 오래 남는다.
나는 아직도 가끔 생각한다. “내가 그 마을에 있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과연 나는 침묵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나도, 아주 작은 이유 하나로 침묵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무섭다.
〈이끼〉는 그렇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정말 잘 만든 영화이고, 단순한 ‘범죄 영화’로 분류되기엔 아까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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