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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이겨야 진짜가 된다 – 영화 〈승부〉

by 블립정보 2025.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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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승부 공식 포스터 – 이병헌이 조훈현 역으로 바둑 대결을 준비하는 모습
이미지출처-네이버영화

 

조용한 전쟁이 시작됐다 – 영화 〈승부〉를 보고

사람이 사람을 이겨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다름 아닌 스승이라면, 그 승리는 과연 기쁨일까, 고통일까.
영화 〈승부〉는 바로 그 복잡하고 모순된 마음을 마주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바둑이라는 정적인 소재를 통해, 인간 사이의 깊은 감정과 세대의 교차를 묘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건드린다.
그리고 나처럼 바둑을 전혀 모르는 사람조차 어느새 돌 하나, 수 하나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 조용한 긴장감이 화면 너머로 흘러나온다.
사실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바둑이란 소재가 영화로 얼마나 흥미롭게 풀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고
게다가 요즘처럼 자극적이고 빠른 장면 전환에 익숙한 관객들이 과연 이 영화를 끝까지 집중해서 볼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첫 장면이 시작되고,
이병헌이 조훈현으로 등장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와 눈빛, 그리고 묘하게 무거운 공기의 흐름이 이건 그냥 ‘바둑 이야기’가 아니구나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등장하는 유아인 역시 말이 없어도 그 공간을 꽉 채운다.
이 둘 사이의 공기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대사 없이도 느껴질 정도다.
이 영화는 실제 인물,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조훈현은 한국 바둑의 전설이었고, 그가 키운 제자 이창호는 결국 스승을 뛰어넘은 인물이다.
그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실화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안에 담긴 감정, 관계, 시간, 그리고 상실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룬다.
마치 ‘이겨야만 했던 사람’과 ‘져줄 수 없었던 사람’이 서로를 향해 수없이 돌을 놓아가며, 자신조차 몰랐던 마음을 알아가는 것처럼.
둘의 관계는 처음엔 분명했다.
스승과 제자,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하지만 바둑이라는 세계는 결국 이기는 자가 살아남는 세계고,
언젠가는 제자가 스승의 자리를 노려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 찾아왔을 때,
감정은 흐트러진다.
이길 수밖에 없는 이창호의 냉정한 눈빛과,
그에게 패배하며 혼란스러워하는 조훈현의 얼굴이 겹칠 때
관객은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못한다.
그만큼 이 영화는 양쪽 모두의 입장을 깊이 있게 다룬다.
이병헌은 역시나, 조훈현이라는 인물을 완벽히 소화한다.
말이 많은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서, 손끝에서, 잠깐 멈칫하는 호흡에서 수많은 감정이 읽힌다.
그가 돌을 놓는 장면 하나하나가 마치 수십 줄의 대사보다 강하게 느껴진다.
그런 조훈현을 마주하는 유아인의 이창호는 철저히 절제되어 있다.
눈빛 하나로 모든 감정을 전달하고,
돌을 놓는 순간에도 흔들림이 없다.
그런데 그 눈빛 안에 담긴 감정은 한없이 깊고 섬세하다.
존경과 질투, 동경과 결연함이 동시에 묻어난다.
둘의 첫 공식 대국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이야기의 갈림길이 된다.
그날 이후, 그들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같은 공간에 앉아 있어도,
같은 대국을 치르고 있어도
더 이상 그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있지 않다.
그리고 그 변화는 관객에게도 어떤 불안함과 슬픔으로 전해진다.
이긴 쪽도, 진 쪽도
결국 상처를 남긴다.
〈승부〉가 뛰어난 이유는 이런 복잡한 감정들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고
조용히 보여주며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감독 김형주는 과장된 장면 하나 없이,
정적 속에서 감정을 증폭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감정 그 자체에서 나온다.
편집도 과하지 않고, 음악도 꼭 필요한 순간에만 등장한다.
그 절제가 오히려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엔
단지 영화 한 편을 봤다는 느낌보다는,
누군가의 인생을 엿보고 나온 느낌에 가까웠다.
바둑을 잘 몰라도 상관없다.
이 이야기는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
그 안에 생기는 균열과 회복,
넘어서는 것과 지켜주는 것 사이에서의 갈등을 다룬다.
그건 누구에게나 있는 이야기니까.
가장 좋았던 건,
이 영화가 어느 한쪽에 편을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스승도 이해되고, 제자도 이해된다.
그 둘의 관계가 꼭 화해로 끝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끼게 만드는 영화였다.
누군가는 그렇게 서로의 삶을 지나가야만 완성되는 사이도 있다는 걸
조용히, 그러나 깊이 알려주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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