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연가시> 리뷰 – 평범했던 하루가 무너지는 그날
한강 다리 위. 누군가 조용히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뉴스에서 한 번쯤 본 듯한 장면. 그런데 이게 계속 반복된다면? 영화 <연가시>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왜 아무 이유 없이 물에 뛰어드는 걸까. 영화는 그 기묘한 공포를 너무나 현실적인 방식으로 끌어안는다. 괴물도, 전염병도 등장하지 않지만 이상하리만치 무섭다. 우리가 매일 밟고 있는 ‘현실’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생기는 그 뒤틀림. <연가시>는 그걸 아주 날카롭게 보여준다.
주인공 임재혁(김명민)은 여느 직장인처럼 바쁘고 피곤한 일상을 살아간다. 가족과 대화는 줄었고, 회사는 점점 더 숨 막힌다. 그런데 아내 경순(문정희)이 갑자기 이상하다. 계속해서 물을 찾고, 몸이 점점 말라간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다. 그러다 결국, 그녀가 ‘연가시’라는 기생충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속으로 유인해 숙주를 죽이는 생물. 곤충에게만 나타나던 이 기생충이 이제 사람까지 조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쯤 되면 영화는 재난물처럼 흘러갈 법도 한데, <연가시>는 방향을 살짝 틀어버린다. 거대한 재난이 아니라, 한 가족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재혁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달린다. 정보는 차단됐고, 정부는 입을 다문다. 제약회사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숨기기에 바쁘다. 이 혼란 속에서 재혁은 오직 가족만을 붙잡고 움직인다. 김명민은 이런 절박한 아버지의 모습을 억지 감정 없이 묵직하게 그려낸다. 말보다 눈빛과 걸음에서 절실함이 느껴진다. 어떤 화려한 액션보다도 그게 더 깊이 와닿는다.
경순은 점점 연가시에 잠식돼 간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까지도, 엄마로서의 본능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정희의 연기는 굉장히 절제돼 있으면서도 그 안에 복잡한 감정이 녹아 있다. 욕조에 조용히 몸을 담그는 장면 하나로 모든 걸 설명한다. 설명도, 대사도 필요 없다. 보는 내내 등골이 서늘해진다.
재혁의 동생(김동완)과 그의 연인인 의사(이하늬)는 이 혼란 속에서 재혁 곁을 지킨다. 단순히 사건을 돕는 게 아니라, 무너지는 사람을 함께 붙잡아주는 인물들이다. 특히 이하늬는 정보 전달과 감정선을 동시에 조율하면서, 이 영화의 리듬을 안정감 있게 잡아준다. 조연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존재감이다.
영화를 보며 가장 많이 떠올랐던 건 ‘믿음’이라는 단어였다. 우리는 과연 시스템을 얼마나 믿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누군가가 병에 걸렸을 때, 정부가 대처해 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 약이 없더라도 누군가는 치료제를 만들 거라는 희망. 그런데 영화는 그걸 모두 지워버린다. 결국 남는 건 가족, 아주 작은 공동체뿐이다. <연가시>는 그 현실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연가시는 실존하는 기생충이다. 개미나 곤충에 기생해 물가로 유인한 뒤 알을 퍼뜨리는 생물. 박정우 감독은 이 생물학적 사실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그 방식이 매우 설득력 있고 현실적이라,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고 믿는 ‘본능’이라는 영역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다.
영화가 개봉한 건 2012년. 당시엔 상상처럼 느껴졌던 이 이야기. 하지만 몇 년 뒤 전염병이 우리 삶을 집어삼켰고, 영화는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다. 마스크, 거리두기, 정부 발표, 가짜 뉴스. <연가시> 속 장면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영화가 무섭게 느껴졌던 건 그 때문이다. 그때는 상상 같았지만 지금은 너무 익숙하다.
<연가시>는 공포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인간적인 이야기다. 가족을 지키고 싶은 마음, 살아남고 싶은 본능,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 영화는 마지막까지 뚜렷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한 남자가 끝까지 가족의 손을 붙잡는 그 모습 하나만으로도 모든 이야기가 정리된다. 그건 아주 조용한 결말이지만 오래 남는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물 한 잔을 쉽게 마시지 못했다. 괜히 찜찜했다. 그 감정이 오래갔다. <연가시>는 그렇게 평범한 하루의 균열을 조용히 보여준다. 그리고 말없이 묻는다.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가족을 지킬 수 있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