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닷속 밀수품보다 더 무거운 이야기
영화 〈밀수〉 리뷰: 생존과 불법 사이, 경계에 선 사람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큰 기대 안 했다. ‘밀수’라는 제목부터가 너무 뻔해 보여서. 또 조폭 나오고, 액션 나오고, 뒤통수 맞는 배신 같은 걸로 한 시간 반 채우겠지 싶었다. 근데 막상 보고 나니, 그 생각이 완전 틀렸단 걸 깨달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묵직하고, 오래 남는 영화였다.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감은 가볍지 않다. 이건 결국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선택이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중심엔 바다에서 숨 참고 물질하던 해녀들이 있다. 너무도 조용히, 그러나 너무도 치열하게 살아갔던 그들의 인생이 여기선 주인공이 된다.
평범한 해녀가 밀수꾼이 되기까지
1970년대 후반, 나라 전체가 산업화에 정신 없던 시기다. 어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안 어업이 막히고, 바다에서 건질 게 점점 줄어들자 해녀들의 일감도 뚝 끊겼다. 진숙(김혜수)과 춘자(염정아)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다. 말 그대로 바다에 기대 사는 삶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바다가 등을 돌린다.
그때 권상해(조인성)라는 남자가 나타난다. 예전엔 세관원이었지만 지금은 밀수판을 주무르는 중개 인다. 그는 진숙에게 제안한다. “그 실력, 돈으로 바꿔줄게.” 처음엔 망설였지만, 진숙은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녀였던 그녀는 이제 밀수꾼이 된다. 바닷속에서 생계를 위해 일하던 몸이, 이제는 범죄의 수단이 되어버린 셈이다.
정말 그들만의 잘못일까?
영화를 보면서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이게 진짜 그들만의 잘못일까?' 라는 질문. 진숙과 춘자가 선택한 길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과연 비난만 받아야 하는 걸까?
정부는 생계를 책임지지 않았다. 보상도 없었다. 그저 "이제 하지 마세요"라는 말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생존을 위해 밀수판에 발을 들였다. 먹고살 방법이 그것뿐이었으니까.
이 영화는 그 지점을 너무도 정확히 찌른다. '불법'이라는 낙인보다 먼저,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법과 제도의 빈틈, 그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누군가는 그걸 ‘핑계’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다.
배우들의 연기, 그 자체가 영화였다
김혜수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인 진숙을 보여준다. 거칠고, 상처 입었고, 때론 냉정하지만 그 안에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느껴졌다. 후반부, 진숙이 모든 걸 내려놓고 바라보는 바다 장면에선 말도 없이 그냥 눈빛만으로 이야기를 다 한다. 그 눈빛 하나에 관객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염정아가 연기한 춘자는 또 다르다. 더 현실적이고 더 냉철하다. 하지만 그 안에도 복잡한 감정들이 숨어 있다. 말수는 적지만, 표정과 눈빛 하나하나가 다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둘의 관계가 단순한 동료나 친구 그 이상이라는 것도, 영화 후반부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조인성은 이 영화에서 놀라울 정도로 능청스럽고도 섬뜩하다. 말 한마디에 분위기를 뒤바꾸고, 웃으면서도 언제든 배신할 수 있을 것 같은 불안함을 준다. 이 캐릭터가 무서운 이유는, 실제로 현실에도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바다, 그 자체가 감정이다
《밀수》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다다. 그냥 배경이 아니다. 수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은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감정의 압력이다. 숨이 턱 막히고, 물속에서 흐르는 침묵이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들린다.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아도, 긴장감은 찢어질 듯 팽팽하다.
류승완 감독이 이걸 의도적으로 설계했다는 게 느껴진다. 인물들의 심리를 따라가듯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고, 물속의 어둠은 그들의 감정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영화는 수중 촬영 기술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넘어선다. 바닷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결국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함께 들어가는 거니까.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남는 것들
마지막 장면. 진숙이 홀로 바다를 바라보는 그 장면은 오래 남는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 장면이 가장 큰 울림이었다. 이제 그녀가 무엇을 선택할지 관객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가 더 이상 예전의 진숙이 아니라는 것.
영화가 끝났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묵직했다. 그냥 픽션으로 끝날 이야기였다면 이렇게까지 오래 남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건 지금도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이야기다.
'다른 선택이 없었던 사람들.' 그들이 법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잃어야 하는 세상. 우리는 그걸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할까?
《밀수》는 잘 만든 영화다. 그런데 ‘잘 만든’ 것보다 더 중요한 건, ‘할 말을 한 영화’라는 점이다. 그냥 재밌고 끝나는 영화가 아니라, 보고 나면 질문 하나쯤은 남게 되는 영화. 그게 바로 이 영화의 힘이다.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바다처럼,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