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튀어나온 듯한 몰입감, 스크린을 뚫고 다가오는 공포
<추격자>는 단 한 순간도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관객은 서울의 어두운 골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홍진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을 만큼, 이야기의 힘과 연출의 밀도는 강렬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이 이 영화에 더 깊은 몰입을 가능하게 만든다. 초반의 음산한 분위기, 어딘지 불안한 시선의 카메라, 거기에 배우들의 날 것 같은 연기가 더해지며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흐린다. 스릴러 장르를 넘어선 리얼한 공포. <추격자>는 그걸 제대로 보여준다.
한 사람의 절박함 vs. 무기력한 시스템
주인공 엄중호는 한때 형사였지만 지금은 성매매 여성을 관리하며 사는 인물이다. 그의 시작은 철저히 현실적이다. 잃어버린 여성들을 찾는 이유도 사람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는 점점 다른 마음을 품게 된다. 이건 단순한 추적이 아니고, 누군가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바뀐다.
반면 지영민은 어떤 이유도 맥락도 없이 사람을 죽인다. 죄책감도 없고, 감정도 없다. 그가 보여주는 무표정한 얼굴과 건조한 말투는 그 어떤 영화 속 악당보다 현실적이라 더 무섭다. 경찰은 이미 그를 붙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설픈 대응과 절차 속에서 실마리를 놓친다. 시스템은 제때 움직이지 않았고, 그 결과 한 생명은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놓치지 않고 깊게 파고든다.
캐릭터의 대조,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
엄중호는 이야기 초반엔 이기적이고 거칠며, 동정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미진의 딸을 마주하는 순간, 그에게 감정의 균열이 생긴다. 그 장면 이후 그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사명감인지 죄책감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변화는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다.
지영민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그는 계산하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웃으며 농담을 던지는 살인마의 모습은 관객의 숨을 막히게 만든다. 쫓기는 와중에 넘어진 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어나는 그의 행동조차도 오싹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그 장면은 사실 NG였지만, 배우 하정우의 몰입 덕분에 그대로 사용됐고, 덕분에 더 생생한 장면으로 남게 됐다.
연출이 만들어낸 리얼리티, 나홍진 감독의 선택들
나홍진 감독은 이 영화에서 최대한 '현실'을 담아내려 했다. 핸드헬드 카메라로 흔들리는 시선은 인물의 불안과 혼란을 그대로 따라간다. 색감은 차갑고, 공간은 폐쇄적이다. 서울이 이렇게 음산한 도시였나 싶을 만큼 배경 자체가 공포를 만들어낸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음악의 부재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배경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추격자>는 오히려 소음을 사용한다. 골목의 정적, 비 오는 거리, 자동차 소리 같은 현실의 소리들이 더 생생하게 와닿는다. 이런 연출 덕분에 영화는 픽션이 아닌 현실처럼 느껴진다. 마치 뉴스 속 실제 사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결말이 주는 충격, 끝내 무너지지 않는 악
영화는 끝까지 희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피해자는 끝내 구조되지 못하고, 범인은 처벌보다 먼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트라우마로 남는다. 엄중호는 애써 달려왔지만 결국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 채 무너진다. 그의 좌절은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악은 패배하지 않는다. 최소한 이 영화 속에서는. 그리고 그게 더 현실적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건을 언론을 통해 접한다. 누군가는 처벌받지만, 누군가는 그냥 사라지고 만다. 피해자는 끝내 보호받지 못한다. <추격자>는 그런 냉혹한 현실을 거울처럼 비춘다.
우리가 외면해온 진실, 영화가 건네는 질문
이 영화가 끝나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오래도록 무겁게 남는다. 단지 범죄 영화가 주는 충격 때문이 아니다. 영화가 계속해서 던지는 질문 때문일 것이다. '정말로 이 사회는 누군가를 지켜낼 수 있는가?', '악을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추격자>는 단지 자극적인 이야기를 소비하게 만드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 옆에도, 아주 가까이에 지영민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걸 막을 수 있는 장치는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
그래서 <추격자>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오래도록 남는다. 그 여운이 무겁고, 씁쓸하며, 동시에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