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 - 혼란의 시대
전쟁 영화라고 해서 처음부터 총칼이 휘두르고 포성이 터지는 건 아니었다. 김상만 감독의 영화 <전란>은 아주 묘하게 시작한다. 뭔가 불안한 기운이 가라앉은 풍경. 조용하고 느린 호흡. 그런데 그게 더 무서웠다. 곧 무언가 커다란 것이 무너질 것만 같은 느낌. 그리고 정말 그 무너짐은 사람의 마음부터 시작됐다.
강동원이 연기한 ‘천영’은 전쟁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인물이었다. 처음엔 그저 충직한 무사 같았다. 나라를 위해 칼을 들고,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 사람. 그런데 영화가 조금씩 진행될수록, 그의 눈빛이 변해간다. 충성심이라는 단어 하나로는 설명되지 않는 분노와 상처 같은 것들이 얼굴에 떠올랐다.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이미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죽었다 살아난 것 같았다. 강동원은 그런 복잡한 감정을 과장 없이 표현해 냈다. 조용히 눈을 감는 장면 하나에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 옆에 박정민이 연기한 ‘종려’가 있었다. 천영과는 다른 결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순수하고, 끝까지 사람을 믿으려는 눈을 가졌다. 그런 종려가 곁에 있어서 천영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전쟁터에서 희망을 얘기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어 보일 수 있는 일인지 잘 알면서도, 종려는 그런 사람이었다. 박정민은 말보다 눈빛과 숨결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조용한 단호함, 망설임, 그리고 천영을 바라보는 연민 같은 감정들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종려라는 사람을 붙잡고 싶었다.
선조 역의 차승원은 이 영화에서 아주 묘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임금의 모습은 보통 존엄하거나 비겁하거나 극단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런데 차승원이 보여주는 선조는… 정말 인간 같았다. 비겁한 인간. 나약한 인간. 너무 현실적인 인간이라서 무서울 정도였다. 그는 계속해서 외면한다. 조선이라는 이름, 백성이라는 말, 모두 그의 입에서는 공허하게 흘러나온다. 연기라고 하기엔 너무 차가웠다. 저런 사람이 정말 왕이었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그리고 문득 지금 우리 사회 속에도 그런 '선조'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냥 영화가 아니었다.
<전란>은 거대한 전투 장면이나 화려한 액션 없이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전쟁의 잔혹함을 보여준다. 그건 피가 튀거나 칼이 날아다녀서가 아니다. 오히려 조용한 순간,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입을 다문 채 걷는 장면 속에서, 더 깊은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어떤 장면들에서 말도 없이 눈물이 났다. 특히 천영이 혼자 남은 밤,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는 장면. 거기엔 음악도, 대사도 없었는데 그 고요가 너무 아팠다.
감독의 연출도 무척 절제되어 있었다. 과하게 끌어당기지도 않고, 억지 감정을 유도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진심처럼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스스로 감정을 꺼내게 만든다. 보는 사람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영화였다.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나도 함께 고민했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역사 속 이야기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자꾸 겹쳐진다. 신념을 잃어버린 사람들, 책임을 회피하는 지도자, 서로를 믿지 못하고 점점 멀어지는 인간들. 그 와중에도 끝까지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누군가의 손. 그게 종려였고, 천영이었고, 어쩌면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자꾸 장면들이 떠올랐다. 천영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 “나는 더는 누굴 지킬 수 없어.” 그 말이 너무 무거워서 며칠 동안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었던 사람. 하지만 세상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사람. 나는 그를 욕할 수 없었다. 오히려 너무 아팠다. 전쟁이 끝나고 남은 건 폐허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전란>은 단순한 전쟁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외면한 진심, 우리가 포기한 믿음, 그리고 끝까지 남으려 했던 인간다움. 김상만 감독은 그걸 말없이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이상하게도 아주 조용했다. 주변 사람들도 말이 없었다. 각자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영화는 감상평보다 침묵이 많은 법이다. <전란>은 그런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