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살》 – 우리가 기억해야 할, 묻혀버린 이야기
영화 《암살》을 처음 본 건 개봉 당시였다. 사람들이 “재밌다”, “전지현 연기 잘하더라” 이런 말들을 많이 해서 보러 갔었는데, 사실 그땐 그냥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년이 지나고 다시 봤을 때는 마음에 더 오래 남았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더.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처음엔 액션에 눈이 가고, 두 번째는 인물들이 보이고, 그다음엔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보인다.
어떤 삶은 기록되지 못했다는 사실
《암살》은 1933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다. 조선총독부의 고위 장성과 친일파 암살을 지시받은 임시정부 요원이 독립군 세 명을 불러 모으고, 암살 작전을 실행해 나가는 이야기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게 줄거리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암살 작전’ 그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느껴지는 게 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 독립군이든, 청부살인업자든, 혹은 변절한 옛 동지든, 그들이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를 차근차근 보여준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나누기보다는 그 시대의 선택이라는 게 얼마나 무거웠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 시대를 살아낸 얼굴들
전지현이 맡은 ‘안옥윤’은 처음에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동안 로맨틱 코미디에서 많이 봐서, 저격수 역할이라니? 싶었는데... 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지현이 아니라 안옥윤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말이 없고, 표정이 많지 않은 캐릭터인데 오히려 그래서 더 눈에 들어왔다. 그 침묵이 너무 묵직하게 다가왔다.
하정우가 연기한 ‘하와이 피스톨’은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뚜렷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그가 사람을 보고, 순간의 감정으로 선택하게 되는 모습이 이상하게 뭉클했다. 삶의 목적이 거창하지 않아서 더 와닿았달까.
그리고 이정재의 ‘염석진’. 처음엔 ‘변절자’로만 보였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까 그도 하나의 시대의 산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했던 선택이 다 이해되진 않지만, 최소한 왜 그랬는지는 알 것 같았다. 쉽게 말할 수 없는 인물, 그래서 더 현실적인 인물이랄까.
조진웅, 오달수, 최덕문 같은 배우들도 너무 좋았다. 이분들은 어떤 영화든 자기 역할을 정확히 해내는 분들인데, 여기선 그 시대의 공기까지 전달해 주는 느낌이었다. 묵묵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사람들.
잘 만든 영화, 이상으로
연출적으로도 《암살》은 정말 잘 만든 영화다. 시대 배경을 구현한 디테일도 좋았고, 총격 장면이나 추격 장면도 몰입도가 높았다. 하지만 그런 액션보다 더 강하게 기억에 남는 건 인물들의 말, 표정, 침묵이었다.
이 영화에서 좋았던 건, 누가 봐도 감동적인 명대사보다는, 별말 없이 지나가는 장면에서 마음이 콕 찔리는 순간들이 많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슬퍼서 우는 장면보다, 울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 것처럼.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마지막, 안옥윤이 염석진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그 장면에서 느껴지는 건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상실감, 실망, 그리고 어떤 슬픔.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염석진의 눈빛도. 살고 싶어서 한 선택이었지만, 결국 그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지워지지 않는 과거. 그 장면 하나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다 전달됐다고 느꼈다.
그냥 영화가 아니었다
처음엔 그냥 재밌게 만든 시대극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암살》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고,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삶들에 대한 기억이다.
이 영화가 잘 만든 액션 영화 이상인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진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 하나를 미화하지 않고, 누구 하나를 악마로 만들지도 않으면서, 그저 그들이 살았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 영화.
그래서, 지금 이 영화를 본다는 것
요즘처럼 역사에 대한 관심이 점점 옅어지고 있는 시대에, 《암살》 같은 영화는 다시 봐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단지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니까.
당신이라면 그 시대에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 질문은, 사실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다.